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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3:10-16
강설날짜 2023-06-1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FcE1hDm_74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고전3:10-16)

 

성도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중요한 것입니까? 성경을 바르게 알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임스 패커 신학자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학생의 필독서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제단”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단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단에는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오해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신학교 교수님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바르게 가르쳤지만, 목회의 현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의 말씀대로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하도록 했다면 수정하여 바르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출 받은 후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이유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성막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사라집니다. 성막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성전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모세오경에 기록된 방법으로 제사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제단입니다. 제물을 올려놓는 곳이 제단입니다. 그 당시 제단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단을 통해 유대인들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죄에 대해 속죄하며 화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성전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인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모형으로 존재하는 장소였습니다. 메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더 이상 성전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단이 필요하다면 오늘날에도 구약 시대처럼 제물을 바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모두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같은 의미입니다.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므로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2장에서 돌로 지어진 성전 자체의 종말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는 바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단을 금지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 전하는 장소를 제단 또는 강대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강도상이라고 했습니다. 강도라는 것은 도둑질하는 장소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강도사를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도둑질을 잘해서 강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강도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학문을 배웠다는 것이며 노회로부터 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 강도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강도상을 강대상이라고 합니다. 좋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제단과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성전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는 계속 제사하라고 하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과 대화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팡이 교회는 예배당에 모여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는 존귀합니다. 존귀한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다시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까?”라는 강설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문제로 시기와 질투를 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수준에 맞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처음 듣는 자들에게 갓난아이들이 먹는 젖처럼 수준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갓난아이에게 처음부터 밥과 고기를 먹일 수 없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갓난아이에게 맞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참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함으로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전도를 위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육신에 속한 자”의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를 위해 풍성한 은사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은사가 좋다고 생각함으로 인해 서로 시기와 질투하며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존중하며 주의 길을 가야 했지만,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심기도 하며 물을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은사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을 심는 자와 물을 주는 자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교회가 파당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역자의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기 때문에 파당을 만들지 아니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되돌아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라는 강설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을 믿으며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온전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향해야 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파당을 만들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 자체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신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떠한 존재로 생활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10절을 보시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 강설을 들어서 알겠지만, 바울은 심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자신이 전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하셨습니다. 건축에 있어서 기초 공사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 공사를 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돌로 세워진 집과 신전이 많았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는 고린도 교회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없이 건물이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초 공사를 한 후 또 다른 건축가들이 건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합니다. 건물이 세워지듯이 교회도 같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건축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 하라고 하십니다.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건축가들이 만든 집처럼 세워져 가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쓰러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협력하여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건물을 세울 때 세상 사람들은 안전하게 짓고자 노력합니다.

 

성도는 재림의 주가 오시기까지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교회는 온전해지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세워진 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11절을 보시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복음의 터가 심어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복음의 터를 위해 사역해야 합니다. 심기도 하며 물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다른 도를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똑같습니다. 가라지는 세상의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반대로 알곡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오직 복음이 심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는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욕망은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는 욕망이 있습니까? 자신을 위한 욕망입니까? 가족을 위한 욕망입니까?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종교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까? 한 번 고민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한 후 건축에 사용되는 자재를 이야기합니다. 13절을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금과 은 그리고 보석 즉 값비싼 재료를 이야기합니다. 값비싼 재료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값싼 나무와 풀 그리고 짚을 이야기하기도 하셨습니다. 값비싼 재료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순수하며 변치 않고 영원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값싼 재료는 일시적으로 좋을 수 있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지지 않는 것은 마지막 날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금과 은처럼 보석 같은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금과 은 그리고 보석도 영원한 존재라고 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보석을 이야기한 것입니까? 사람의 수준에 맞게 사용된 용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보석은 상징입니다. 세상의 재료는 영원하지 않지만 변치 않는 진리 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온 성도의 구원입니다. 마지막 날은 주님의 날이며 또한 심판의 날입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심판은 영원한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불의 의미는 사람의 공적을 시험하는 용도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속임수가 없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사람은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별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만 구원받았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보석을 숨기는 자입니다. 보석이 무엇인지 아는 교회는 보석의 비밀 즉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불의 심판에서 그대로 존재하는 자들은 구원의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구원과 보상이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14절을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위한 연단의 과정에 있습니다. 금과 같은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에 세워진 교회는 정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며 단련하십니다. 이것을 알기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기에 교회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존귀한 자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힘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연단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는 자신의 공덕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불입니다. 불에 견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심판을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15절은 개인적으로 난해 절로 생각하며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억지로 풀다가 오히려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많이 오해하는 것이 성전이며 성령입니다. 눈에 보이는 구약 시대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성령도 우리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지 않습니다. 성전의 실체인 주님께서 오심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파괴하신 후 우리 안에 성전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2: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입니다. 누구를 의미한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실체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였던 성전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모형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연약하여서 성전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거부하셨지만,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성전이 만들어졌을 때는 좋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용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까? 고전6:19절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니라”입니다. 우리가 성전이기에 너희는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스스로 자기 몸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정욕과 욕심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성전의 용도를 몰랐습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라라” 즉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죽이라 그러면 사흘 후에 부활함으로 참된 성전의 실체라는 것을 증명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눈에 보이는 성전의 용도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전이 내 안에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적 성전이라는 근거는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여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전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임재가 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며 유대인들처럼 장사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며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며 자신을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좋아하며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며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라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등으로 변질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부인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사람의 노력과 행함 그리고 시기와 질투 등은 마지막 때에 불로 심판하실 때 오 주님이라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마지막 때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대한 것은 다음 주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바른 용어를 알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기도하는 집이며 성령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전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비유로 말씀하였습니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좋은 터가 중요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터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위에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고린도 교회처럼 돼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건물이 약하면 사람을 죽이는 장소가 될 수 있지만, 건물이 든든하면 사람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 가라지로 존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오 주님이라고 하며 외치지만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든든한 교회는 몸과 영혼의 부활을 받으며 오 주님이라고 하며 혼인 잔치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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