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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6 10:12

장성한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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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4:20-28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28)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냥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집이었기 때문에 유산을 받아서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유산을 받았기 때문에 부귀영화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방탕한 삶으로 부귀영화는커녕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존심이 있었던 탕자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고국이 아닌 이방인 지역에서 생활하다 보니 궁핍한 삶은 목숨까지 위태롭게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 탕자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았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탕자는 아버지가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그들을 위한 음식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탕자는 그들 중에 일꾼으로 일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만난 후 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탕자는 일꾼들과 같이 저도 품꾼으로 받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자신이 얼마나 존재가 없는 삶을 살아왔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잃었습니다. 존재 없는 가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시며 살 수 있도록 애원합니다. 일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삶을 돌이킨 탕자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탕자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탕자의 마음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탕자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당신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돌이킨 탕자와 같은 마음이 될 때 교회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탕자와 같은 마음으로 돌이킨 지팡이 교회는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으로 먹이시는 강설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듣기 전 잠시 지난주 강설을 되돌아보겠습니다.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위한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사용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 언어를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말하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러시아 사람이 나에게 하나님 나라의 언어인 방언으로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러시아로 말해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언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방언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지팡이 교회는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 강설을 잘 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을 절제하라고 권면합니다. 20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선한 마음만 있지 않습니다. 악한 마음도 존재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판단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면서 지혜로운 생각으로는 장성한 사람처럼 해야 합니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룹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결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른 결정을 내일 수 있도록 사람은 장성한 사람처럼 판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바른 선택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생각하며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은 고린도 교회는 성숙한 사람처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순수하고 공격하지 않는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28:11-12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가 기록한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모세가 기록한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합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믿는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장성한 사람처럼 바른 선택을 하면 됩니다. 은사는 교회의 덕을 위해 있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그들처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거부한 자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을 이용해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장성한 사람처럼 지혜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22절에서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방언은 불신자들이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복음이 퍼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방언을 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합니다. 지금까지 강설을 들은 성도는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방언으로 강설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강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으로만 말하면 이상한 강설이라고 할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교회 안에 모여서 서로 방언으로 말하면 자기들은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겠다고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방언으로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사람만 방언으로 말해도 이상한 데 신자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면 사이비로 생각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방언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사용하여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너희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을 이야기한 후 24절에서는 예언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방언과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예언은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와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예언을 들음으로 인해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은 책망과 판단의 기능이 있습니다. 예언은 죄를 깨닫게 하도록 함으로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의 유익을 계속해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입니다.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있는 속마음을 드러내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예언을 들음으로 인해 자기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언은 속마음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죄가 무엇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비로소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하며 복음을 전파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감추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되도록 해야 합니다. 숨겨진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장성한 사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무엇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시면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입니다. 교회 안에 찬송시도 있고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방언과 통역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교회는 덕을 위해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덕을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덕을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는 교회는 서로 연합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예배는 찬송과 강설 그리고 통역과 방언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가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에 자연스럽게 방언과 통역 그리고 예언도 사라지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질서가 있게 하려고 방언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시면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위해 방언의 질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방언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으로 제한했습니다. 아마도 구약에서 증인을 세울 때 숫자를 생각하며 말한 것 같습니다. 방언하더라도 차례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방언만 하지 말고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방언이 갖는 유익이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방언과 같은 예언 등을 하나님께서는 사라지도록 하셨습니다. 아마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사도 바울은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며 교회의 예배를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질서 있게 방언하더라도 교회의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통역하는 성도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 통역할 수 있는 성도가 없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방언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하면 교회는 덕을 세우기보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리니 교회는 장성한 사람처럼 늘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말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성경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장성한 사람처럼 판단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며 예언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회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덕입니다. 사도 바울은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질서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질서가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서로 차례대로 방언하도록 하며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없다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듯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교회 안에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잠잠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유익입니다. 절제하는 것도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방언과 예언 등과 같은 것이 예배 시간에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 시대만 있도록 하셨고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예배 시간에 사라지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말씀을 알아 들도록 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장성한 신앙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예배하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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