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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21:00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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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장원 목사
강설날짜 2023-06-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6usjVwVVuc

한국교회사

 

 

전장원 목사(엘 카르디아 목회아카데미)

 

 

1. 한국 개신교의 전래 준비

복음이 한국 땅에 전래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며 은혜이다.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해 있었던 현실, 그 역사를 조금만 돌아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한국은 조상 대대로 우상숭배의 나라였다, 둘째, 당시는 한반도 내외적으로 위기와 혼돈과 갈등을 겪었던 시기였다. 내부적으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이 있었고 대외적으로 일제를 비롯한 서구열강이 문호 개방에 압력을 가했던 시기였다. 셋째, 개신교 전래에 앞서 천주교의 박해가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다. 신해-신유-기해-병오-병인박해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포교의 자유는 없었다. 넷째, 절망스러울 정도의 위생과 수많은 전염병이 사람의 생명을 노렸던 상황이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다고 할 수 없었던 때에, “때가 차매” 주님의 복음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태고의 벽을 깨트리고 이 땅에 뿌려졌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어도 그래도 소망이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겨레가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았어도,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고 영원한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국개신교 전래 준비에 있어서 먼저 경교의 중국 전래가 있었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 일파들이 페르시아로 이동했고, 그들의 신앙이 경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신앙은 알로펜을 위시한 사절단을 통해서 635년부터 당나라에 전파되었다. 경교가 한반도에 전해졌는지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천주교는 임진왜란 때 세스페데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그의 사역은 왜병들에게 국한했지만, 조선인들과 어느 정도 접촉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끌려간 우리 백성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수용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파하기보다는 한국인이 직접 중국을 왕래하면서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성호 이익의 제자인 이벽, 권철신,권일신, 정약종,정약전 등을 중심으로 서학으로서 연구가 먼저 시작되었고 1784년 이승훈이 첫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부터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박해를 통해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혹한 순교를 당했다. 그런 와중에 영국의 머리 맥스웰과 바실 홀이 순양함을 타고 와서 서해안 해도를 작성하려고 한반도에 방한하게 되었고, 1816년 마량진에 도착하여 첨사 조대복에게 최초의 성경을 전래한 역사가 있었다.

 

 

2. 선교사들의 입국과 복음의 수용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832년 7월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가 로드 암허스트호를 타고 통역관으로 서해안에 도착했다. 배는 서해안 장산곶을 지나서 고대도에 머물게 되었는데, 당시 순조에게 성경과 선물을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성경을 전해주고 한문 성경의 주기도문을 서생 ‘양이’에게 번역하도록 했고, 감자를 재배하는 법, 포도주를 담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이어서 원래 중국으로 파송되었던 토마스(R. J. Thomas) 선교사가 1865년 1차 서해안에 도착하여 성경을 전하고 돌아갔다 1866년 8월에 다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를 타고 서해안으로 와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향했다. 제너럴셔먼호는 선장도 있었고 소유주도 승선하고 있었다. 통상의 목적으로 많은 서양 물품을 싣고 왔고,토마스 선교사는 윌리엄슨이 챙겨준 성경을 많이 갖고 와서 한국인들에게 전해주며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9월 5일 순교했다.

한 나라가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축복이다. 만주 우장지역에서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의 노력으로 의주 출신 청년들인 이응찬, 백홍준,이성하, 서상륜 등의 도움으로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일본에 머무는 동안 복음을 영접한 후 헨리 루미스(H. Loomis)의 권유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 또한 이수정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선교를 촉구했다.

이러한 번역된 성경은 복음 전파 현장에 전해졌다. 존 로스의 동역자들인 서상륜과 서경조에 의해 소래교회, 김청송에 의해 집안현교회, 백홍준에 의해 의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한국 복음 전래를 위해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들의 접촉과 그들의 협력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소개로 미 북감리교 맥클레이(R. S. Maclay)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한국의 병원 선교와 교육의 윤허를 받을 수 있었다.

 

 

3.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국교회의 발전

1884년 9월 20일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 땅에 정주하면서 사역하려고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알렌(H. N. Allen)이 인천을 거쳐 서울에 입성하여 고종의 배려로 광혜원을 시작했다. 광혜원은 포교 자유가 없었던 그때 선교의 교두보였다. 다음 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미 북감리회 아팬젤러(H. G. Appenzeller) 부부가 제물포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네 곳의 선교사회를 통해 입국하였다. 가장 먼저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북 장로회에 이어서 1889년에는 호주장로회, 1892년에는 미국 남 장로회,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또한 미국 남 감리회와 말콤 팬윅과 같은 독립선교사가 입국하여 복음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1886년 7월에 국내 최초의 개신교 세례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서 집례가 되었다. 바로 노춘경(노도사)이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어서 1887년 9월 27일 장로교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고, 또한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의 감리교 정동교회(벧엘 예배당)가 설립되었다.

입국한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데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도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전도 여행으로 2달간 북쪽을 순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6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선교 여정을 감당했다. 선교부는 병원을 세워서 그리스도의 박애 정신을 펼쳤다.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사역들을 통해서 복음의 접촉점을 마련했고,미션스쿨을 설립해서 성경과 신앙으로 인재 양성을 해 나갔다. 초기 한국교회 선교부의 여러 사역들은 의료인재를 양성하는 차원까지 나아갔고, 오늘날의 선교 한국의 토대를 놓았다. 아울러 미션스쿨의 인재 양성은 나라를 빼앗긴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다시 꿈꾸게 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한 기둥들로 세운 중요한 사역들이었다. 선교사들의 성경 번역과 문서 사역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문맹율을 낮추고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초기 한국교회 선교 정책은 네비우스 정책(Nevius Method)으로서 자립, 자치, 자전이었다. 그런데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성경 공부를 중시했고 성경 공부와 사경회에서 더 나아가 성경학원 설립 등 성경 교육의 토대 위에서 1903년 하디의 원산 부흥 운동, 1906년 서울과 목포 등지에서의 부흥 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선교지 분할정책은 여러 교단의 선교부가 내한한 상황에서, 부족한 선교사 및 교역자를 적실하게 배치하고, 선교사역의 중복을 피하는 효율적인 사역을 가져오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4.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일찍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주장했듯이 부흥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따른다. 그러나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사모할 의무와 특권이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신앙적 본질에 충실하게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으며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했고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예배했다. 원산지역의 부흥의 배경에도 화이트(M C. White)와 맥컬리(L. H. McCully) 두 여선교사의 기도가 있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교회에도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들과 하디가 함께 했던 “연합성경 공부 및 기도회”에서 선교사 하디가 먼저 은혜를 받은 후 성령의 역사가 이 지역 교회에 강하게 임했다. 그의 목회가 많은 열매를 거두지 못했던 지경 내에서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이 역사는 원산을 넘어 서울, 평양, 제물포로 이어갔다.

부흥의 불은 계속 번져서 1906년도 서울과 목포 등지에서 부흥의 불길이 치솟았다. 저다인(J. L. Gerdine) 목사가 인도하였던 목포양동교회(목포 새한교회)에서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려고 줄을 지어 섰다.

부흥 운동의 절정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1월 2일에서 15일까지 있었던 평안남도 남자 도사경회에서 일어났다. 존 스톤(Howard Agnew Johnston)이 앞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의 소식을 전해주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도전받았다. 특히 장대현교회 길선주 장로와 이길함(Graham Lee) 목사가 큰 은혜를 받았다. 1907년 1월 2일부터 부흥사경회가 시작되면서 800명〜1,000명 혹은 1,500명 이상이 모였고 멀리서 평양지역 1월의 추위를 뚫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여 몰려들었다. 이 기간 동안 놀라운 은혜가 쏟아져 자발적이고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변했다. 아이들도 통회하느라 공부를 못할 지경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평양의 기독교 기관만 이 아니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으로도 번져갔다.

1909년부터는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기독교인들이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 하에 구령의 열정으로 헌신했다. 시간과 날짜를 연보하며 발로 걷고 뛰며 거리와 시장을 찾아갔고, 가가호호 방문하는 축호전도를 진행해 나갔다. 백만인구령운동은 지방으로도 확산되었고, 한일병탄이 이루어진 1910년에는 전국적 규모로 더 확대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잃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부흥의 은혜를 주셔서 어려운 일제강점기와 이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붙잡을 수 있게 하셨다.

 

 

5. 한국교회 신학교의 설립과 총회의 조직

한국교회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사경회와 성경학원을 통해서 성도들이 말씀 위에 튼튼하게 세워지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양상이 이루어졌다. 이에 더 심도 있는 신학 교육을 통해서 헌신 된 목회자를 양성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당시 선교사들이 늘어나는 교인들과 교회를 섬기기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네비우스 정책의 자립 원칙에 따르면 한국인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선교의 방향이었다. 전문적인 목회자 교육은 처음에는 신학반 교육 정도로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신학교 설립이 계획되었다. 장로교회는 1901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감리교는 신학반, 신학회, 신학부로 발전하다가 1907년 남북감리회 선교부가 합동하여 협성신학교를 설립했다. 동양선교회에서는 1911년에 경성 무교 정에 세운 전도관에서 임시 성서학원을 개설하고 다음 해에는 교사를 신축하여 신학 교육에 돌입했다. 신학잡지도 창간되었다. 협성신학교에서 1916년에 「신학세계」를 창간했고, 평양신학교에서는 1918년에 「신학지남」을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성결교에서는 「활천」을 발간했다.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교장으로 취임해 방기창과 김종섭을 첫 신학생으로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7년 6월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고 그해 9월 17일 독노회에서 7명이 모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장로회 최초의 목사들로서 이들의 이름은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송인서,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초창기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은 마포삼열(마펫),이길함(그레이함 리), 소아론(스왈른), 곽안련(클락) 등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쳤다. 평양신학교 교수진에는 남장로회의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 호주장로회 왕길지(엥겔) 선교사 등도 참여하여 연합사역으로 운영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12년에 총회를 창립했다. 장로교총회는 처음부터 선교에 열정을 가졌다. 앞서 1909년에 독노회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최관홀을 파송한 바 있었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을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선교를 받았던 한국교회가 이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6. 일제강점기 한국교회

1895년 10월 8일 일제의 미우라 고로 공사가 일본 낭인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이후 고종황제와 태자는 경복궁에 사실상 구금되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형편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비슨, 제임스 게일, 헐버트 등의 선교사들은 고종의 침전 가까이에서 불침번을 섰다. 한 달 후인 1895년 11월 28일 반일, 친러, 친미적인 정동구락부가 결성되어 31종을 경복궁에서 나오게 하여 새로운 정권 수립을 시도했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도 언더우드,에비슨, 헐버트 선교사 등이 무기를 소지하고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섰다. 선교사들의 이런 행동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나라라 민족에 대한 애정과 충군 애국정신을 고취했다. 구한말 위기 속에서 서양 선교사들은 성탄절과 교회 절기에 태극기와 십자가기를 게양하거나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애국가를 애창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1911년 시작된 105인 사건은 일제가 신민회와 서북장로교회를 압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조작한 사건이었다. 일제는 이들이 데라우치 총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근거없는 누명을 씌워서 반일 세력들을 붕괴시키려 했다. 일제는 체포한 기독교인들을 72개 종의 고문 기술로 무자비하게 박해하였다. 105인 중에는 장로교인 만 8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수난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가 애국정신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짧은 기간 준비된 거국적이고 민족사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국외에서 신한청년당, 만주노령지역 단체, 미주 대한인국민회, 일본 YMCA가 주최한 2.8 독립선언, 그리고 국내에서의 서북지역 준비와 서울의 세브란스와 YMCA를 통해 거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이승훈 장로의 역할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먼저 기독교계를 결집시키고 천도교와의 연합도 이루어냈다. 3월 1일 2시에 폭력 사태의 발생을 우려 한 결과 33인의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때 학생과 시민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호응해 전국 218개 군 중에 212개 군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인, 천도교인이 15인, 불교인이 2인으로 구성된 것만을 보아도 3.1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지대했다. 병천 아우내 시장의 유관순과 광주 수피아 여학생 윤형숙, 그리고 두 팔이 다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문용기 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일제 강점 기간 내내 한국교회는 대 사회적 책임과 사회계몽 및 사회변혁에 대한 책임을 감당했다. 조만식 선생과 산정현교회는 나라 살리기 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고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학생들과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참여했다. 한국기독교는 YMCA, 엡웟청년회, 청년면려회 등의 청년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독교로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다, 교회는 물산장려운동, 금주,단연 등 절제 운동, 공창제 폐지 운동 등 건전한 사회 수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압제에 맞서 우리 민족이 함께 나아갈 미래를 준비하려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한국 교계에 불어 닥친 가장 혹독한 시련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성도들을 투옥하고 그들에게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일제는 남산에 신궁(조선신궁)을 지어서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우리 민족을 종교적으로 동화하여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공립학교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이어서 미션스쿨에게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미션스쿨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를 받은 선교부나 학교 당국자들은 신사참배와 폐교 사이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먼저 천주교와 감리교가 1936년 이전에 모두 신사참배 수용을 결의했다. 한국장로교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장로회의 4개의 선교부인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가운데 캐다나장로회를 제외한 세 개 장로회 선교부는 학교가 폐교되는 일이 있어도 신사침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순응하고 학교를 유지했다.

일제는 미션스쿨을 이어서 한국 장로교총회를 협박하고 회유했다. 결국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도 신사참배에 가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 한 이들은 개인적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시작하여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이들 가운데는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이기선 목사,주남선 목사,한상동 목사, 박관준 장로, 손양원 목사, 최상림 목사, 황철도 목사들이 있었다. 선교사 중에는 맥라렌, 서덕기 목사 등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태양신 숭배 강요에 무릎 꿇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저항했던 많은 신앙인들이 고초를 당했다.

 

 

7. 신학적 도전과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

초기에 한국교회를 정초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건전한 신학, 가장 보수적인 신학,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했다. 그러나 점차 자유주의 신학도 감리교회와 캐나다 선교부, 일본신학교 등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감리교 유형기 목사가 주도했던 「아빙돈 단권주석」 발간에 대해서 박형룡 박사는 이 주석이 성경의 파괴적 고등비평의 원리와 종교 진화론적 관점을 취했으며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등의 자유주의 사상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주석의 번역 과정에 참여한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한경직 목사 등 장로교 학자들은 사과 성명서를 내놓았다. 김영주의 창세기 모세 저작권에 대한 견해, 김춘배가 계기한 여성의 가르침 허용, 신흥우의 적극 신앙단 등 사건이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과 관련이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정경옥, 김재준 등의 자유주의 및 진보주의 혹은 바르트주의가 한국교회 안에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도 교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보수적 신학을 고수하려 했던 박형룡 박사의 활동이 자유주 의와 신정통주의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나타났다. 박형룡은 보수신학을 사수하기 위하여 「근대신학난제 선평」을 출판했으며, 「아빙돈 단권주석」에 맞서 출간된 공동 「표준성경주석」의 책임 집필을 맡았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출옥성도"들이 1945년 8월 17일에 평양 감옥이나 청주감옥 등에서 출옥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한국교회에 재건의 필요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 재건을 위해서는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동조했던 부끄러운 일을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다. 사실 해방 후 한국교회 재건 운동은 감옥에서 이미 기도로 시작되었다. 실제로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던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은 해방이 되면 어떻게 새롭게 한국교회를 재건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북 교회 노회들과 남한의 경남노회에서의 재건 운동의 공통된 주요 핵심은 모든 교역자들이 회개 자복하는 것이고 자숙하는 기간을 갖는 것이고 신학교를 복구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개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순응했던 어떤 이들은 자신들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큰 수고를 했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기도 했다. 북한에 있던 교회들은 소련공산당이 김 일성을 앞세우고 자행한 무자비한 박해를 당했다. 기독교에서는 공산정권에 대응하기 위해서 ”기독교 사회민주당”과 “조선민주당”을 결성했지만, 공산당의 살해와 파괴, 탄압으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한경직 목사와 이윤영 목사 등은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재건은 신학교 재건과 연결되었다. 1938년에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그 가을에 평양신학교는 폐교되었다. 그러나 교역자 양성은 계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 지하에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신학 사상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이에 1947년 4월 조선신학교의 학생 51명이 자유주의 신학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는 진성서를 총회에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문제는 고려신학교가 설립되는 주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였다.

해방 후에 한국의 여러 교단들은 신사참배 처리 문제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참여에 대한 견해 차이 문제, 그리고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와의 관계 설정 문제 등으로 인해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한국장로교회에서는 1952년 고신파가 분열되어 나갔고,김재준이 대표하는 조선신학교의 신학 문제로 시작된 갈등으로 1953년 기장측이 분열했다. 1959년에는 WCC 참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승동측과 연동측 사이 에 총회가 분열되어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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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30항 교회의 영정인 질서(교회의 정치) 전은덕 326
97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7-59문 전은덕 2019-02-17 329
96 제37항 최후의 심판(벨기에, 벨직 신앙고백서) 전은덕 살전4:13-18 2017-11-05 331
95 벨기에(벨직) 신앙고백서 제18항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3)- 증인 전은덕 2017-03-26 335
94 벨기에(벨직) 신앙고백서 제15항 원죄 전은덕 2017-02-19 340
9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0-62문 전은덕 2019-02-24 340
92 밸기에(벨직)신앙고백서 제13항 하나님의 섭리2 전은덕 2017-01-22 341
91 제21항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전은덕 히7:1-3 2017-04-30 342
90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4-25문 전은덕 2018-05-20 342
89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7항 보편적 그리스도의 교회 전은덕 행19:30-41 2017-07-30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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