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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7:36-40
강설날짜 2023-11-05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_uCxV2_rtzc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주는 교훈(고전36-40)

 

저는 11월 2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왜냐하면, 성암 이승구 교수님께서 은퇴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은퇴식 기념 강연으로 “개혁신학과 목회의 길과 방향”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저도 잘 알지 못했던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홈페이지 또는 유튜브에서 지팡이 교회 합신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될 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촛대”로 번역하다 보니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말씀 중 사도 요한은 “주의 날”로부터 “큰 음성”을 듣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입니다. 큰 음성은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11절을 보시면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입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곱 초대 교회입니다. 큰 음성을 들은 사도 요한은 몸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큰 음성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돌이켰을 때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곱 금 촛대”입니다. 12절을 보시면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혁 개정은 일곱 금 촛대로 번역되어 있지만, 공동번역에는 “황금등경 일곱 개” NIV는 “일곱 금등잔대”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등잔대는 등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오류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한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어로 번역하다 보면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고자 했지만,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의 문맥은 이상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오류가 있다면 수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일곱 금 촛대”입니까? 아니면. “일곱 금등잔대”입니까? 한편 요한이 몸을 돌이켜 본 것은 일곱 개의 개별로 이루어진 촛대로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온 누리에 흩어진 모든 성도 즉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승구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이해하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소에 있는 등대”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출25:31절을 보시면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도 무엇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등대가 있었습니다. 대하4:7절을 보시면 “또 규례대로 금으로 등잔대 열 개를 만들어 내전 안에 두었으니 왼쪽에 다섯 개요 오른쪽에 다섯 개이며”입니다. 그러면서 이승구 교수님께서는 일본어, 베트남어, 중국어도 등대로 번역되어 있다고 합니다. 각국의 나라의 언어는 모르지만, 각국의 나라에 가서 강의할 때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 있던 등대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등대입니다. 그러나 등대의 형태는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초대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개혁신학을 하는 분들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통괄해 봤을 때 성경이 말하는 사상으로 우리를 자꾸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 머릿속에 잘못된 것을 고쳐가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신학과 다른 신학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유주의 주의자들의 성경 신학을 공부할 때 동기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놈이 고놈”인데 즉 성경을 믿지 않는데 왜 공부해야 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이단과 자유주의) 성경이 잘못된 것을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신학생은 교회를 위해 개혁신학을 대변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승구 교수님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기도 했지만, 오류가 있다면 수정해 가겠습니다.

 

저로 인해 한 달 정도 고린도 전서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7장의 첫 시작을 부부의 결혼 즉 혼인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세상 사람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섬김의 생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맞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아도 필요한 대로 각 사람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자기 능력대로 삶을 생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이 세상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생활하는 곳으로 이끌어 가면서 현재의 삶에 매이지 말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위해 본을 보여준 믿음의 선배님이었습니다. 인생을 생활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귀영화의 삶도 아닙니다. 부활한 후 성도의 삶은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귀영화의 삶이 아닌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믿음의 선배님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7장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7장을 마무리하며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3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입니다.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으로 36절은 아버지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시집을 가는 딸을 둔 아버지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관습은 딸에 대한 처분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결혼하는 시기였습니다. 대체로 딸은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독신으로 생활하고자 하더라도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들에게 독신의 은사가 없는 자녀에 대해 결혼시키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정혼자가 있는 딸을 억지로 집에 두지 말고 정혼 기한이 지나면 남편에게 보내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 현실은 아버지 권한은 크다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와 같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녀가 결혼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부모는 딸에 대한 결혼을 계획해야 합니다. 딸의 나이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면 딸은 결혼하고 싶어도 상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7절은 부모가 딸을 결혼시키지 아니하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입니다. 36절은 아버지가 딸을 결혼시키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37절은 딸을 결혼시키지 아니하고자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딸을 결혼시키지 않고 데리고 살고자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있었는지 37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마음을 정하고”입니다. 이 뜻은 마음에 정한 것이 있으면 좌우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곧은 사람은 “부득이한 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해석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꼭 결혼시킬 이유가 없는 자입니다. 예를 들면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 또는 정신이 이상이 있는 사람 그 외 다른 자에 의해 성폭행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아버지의 뜻도 있지만, 자녀는 “자기 뜻대로 할 권리”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혼란스럽더라도 나중에 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도록 미래형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은 바르지 않은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나중에는 잘했다는 것임을 표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6절과 37절에 대해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3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함으로 하나의 단락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켜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을 때를 말씀한 후 모두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36절에 대한 것은 잘하는 것이고, 37절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아버지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에 따름입니다. 참으로 사람에게 있어서 결혼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설교 중 가장 쉽지 않은 본문이 고전7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결혼은 신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며, 독신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해 주의 길을 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주는 교훈에 이어서 사도 바울은 과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고전7:8절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연결해서 말씀하셨을까? 앞에서 말씀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우선 3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섬김이 있으면서도 매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7:8절에서는 사도 바울은 과부들에게 재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9절에서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주 안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니 자기 뜻대로 결혼해도 된다고 합니다. 단, 조건은 “주 안에서만” 하라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 한 몸이기 때문에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이혼에 대한 예외도 있지만,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부로 서로 한 몸이므로 죽음 외에는 서로 갈라설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말씀해 주신 롬7:2절을 보시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사람이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신중해야 합니다. 결혼은 서로에게 매입니다. 매인다고 하면 느낌이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매인다는 것은 종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결속되어 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부는 살아있는 동안에 매여 있는 한 몸이지만, 사별 후에는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 부부가 사별 후 서로가 부활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똑같이 신랑과 신부로 생활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 후의 생활은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서로 알지 못합니다. 서로가 안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부부는 구원받았지만, 자녀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삶과 다른 삶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서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주 안에서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 중에 한쪽은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서로가 부부로 살기 원하면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든 있든 남편 또는 아내와 사별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된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이것을 좀 더 알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6:14-16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남편이 죽으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은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부활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잔다”라는 의미입니다. 잔다는 의미는 부활을 위해 깨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죽음은 부활이 아닌 이별입니다. 하지만, 교회인 성도에게는 이별이 아니라 신랑 되신 예수님과 만남이 있는 부활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며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 하는 교회도 이런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40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하신 것을 마무리하며 “그러나”라고 하셨습니다. 재혼하는 것보다 재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해야 하셨는가? 모두 좋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도 바울처럼 “내 뜻에는”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재혼하면 서로 고난에 노출되기 쉽고 자유로움보다 서로에게 매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부는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구원받은 후 온전하게 알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억지로 풀고 생각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외에는 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매임을 당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매여 사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행복이며 매임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모는 영광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결혼은 부모가 주관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와 상의하여 결혼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하는 예도 있지만, 이런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결혼을 마음대로 하지 말고, 서로 논의해야 합니다. 자녀를 마음대로 지배하고자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독신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부모와 논의해야 합니다. 정욕도 이길 수 있고 신념도 강할 때 즉 결혼이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때 독신으로 생활해도 무방합니다. 그 외 다른 일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결혼이라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주안에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과부에 대해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바울의 말씀은 과부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와 살아야 하며 한 몸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몸이라도 자유로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죽음이라는 사별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유효합니다. 배우자가 사망한 후에는 재혼하든 안 하든 주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부부는 관계는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사람은 모든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있을 때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지막 날을 소망하는 지팡이 교회는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에 늘 말씀을 사모할 것을 믿으며 기도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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