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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9:1-12
강설날짜 2023-11-19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고전9:1-12)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곳저곳을 돌며 신앙생활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떠돌이 신자는 높아졌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모이는 교회로 예배하는 예배당에서 예배하지 않고 인터넷 매체 등을 이용하는 신자도 늘었습니다. 과거에 없던 모습입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다운 교회는 무엇인지 잠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의 본질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구현하는 교회입니다. 예배당을 교회라고 하는 시대에 예배당이 어떻게 즉 건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한 몸 공동체입니다. 한 몸 공동체는 떠돌이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는 교회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 홀로 신앙생활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지 않도록 교회는 말씀의 회복과 성례와 기도와 권징이 바르게 시행돼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가 순종한다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고백 합니다. 왜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고백하는 것이며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즉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한 몸 공동체로서 삼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의 열쇠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쇠 즉 천국의 열쇠는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십시오.

 

잠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지팡이 교회는 저번 주 말씀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상 제물 먹을까? 말까?”는 우상 제물을 먹어도 죄가 아닙니다.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또 다른 신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일신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우상 제물이 놀라운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믿음이 약한 형제가 우상 제물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게 하려고 우상 제물을 먹지 않도록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몸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사도 바울은 사도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셔야 했는지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자요 사도였기 때문에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동고동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특별하게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진짜로 사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 간증하며 논란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누구인가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또한, 신앙의 사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권을 언급하며 오늘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마도 글을 쓰던 중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도 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주위에서도 사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거짓 그리스도인에게 자기의 사도권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유란 믿음 안에서 누리는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 이 세상의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의 자유를 포기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위해 일하는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처럼 나도 동등한 사도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합니다. 자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고 합니다. 사도권을 이야기한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최초로 설립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설립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도는 교회를 세움으로 증거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교회도 세우지 않는다면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사역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도권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이외의 사람들이 나를 사도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도 너희들에게 나는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인 쳐준 것이 고린도 교회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고린도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함으로 바울이 사도임을 증거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도권이 더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합니다. 3절을 보시면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입니다. 나를 비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원어의 의미를 살리면 너희들은 나를 의심하는 것을 넘어 법정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해 심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쉽게 변명이라고 읽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법정에서 사용하는 비판과 변명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도권을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권은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큰 위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잘 들어보십시오. 4절을 보시면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입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고기도 먹을 권리가 있고 물을 마실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8장에서 우상 제물과 연결된 말씀으로 나도 너희처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형제의 유익을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식으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백성이 한 몸으로 모인 교회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고 마실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절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다시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5절에서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고민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표 인물로 게바 즉 베드로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혼자 생활하며 사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독신 또는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RSV 성경에는 난해 주로 사도 바울이 “한 자매를 아내로”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복음만을 전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독신으로 생활하며 복음만을 전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5절에서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독신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결혼하든 안 하든 하면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 대해서 금욕주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금욕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5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일하며 사역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이중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한 시대에 교역자는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딤전5:18) 그런데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연 사도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사례비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과연 사도이냐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일하며 생계비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례비를 요구할 수 있기도 하고 아니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나바와 사도 바울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 일하며 복음을 값없이 전했습니다. 오직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사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을 피하며 사역한 청지기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례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도 주장하지 아니하며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받고자 합니다. 노동했으면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요구할 수 있었지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하며 보상받았습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 알도록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대가를 원합니다. 대가 없이 군 복무하고자 하십니까? 군 복무하며 누가 자기 돈으로 의복과 총을 구매합니까? 일꾼이 열심히 일한 후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일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누가 자비량으로 사역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에 따라 받을 수 있고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형편이 어렵다면 사도 바울처럼 일하며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보상받는 것을 이야기한 후 이제는 결정적인 근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근거는 자신의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니다. 그러면 소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왜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방인들은 소에게 망을 씌워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방인이 택한 방식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율법은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도록 함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소가 일하는 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소는 사람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곡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소보다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보상을 사취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주어야 합니다.

 

소를 비유로 든 사도 바울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신 만큼 주십니다.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이웃의 것을 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0절 말씀을 통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입을 씌우지 말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너무 많은 것을 교회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오늘날 교회도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질문합니다. 복음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을 비축했는지 질문합니다. 11절을 보시면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뿌렸지만 너희는 신령한 것을 비축하고 있느냐입니다. 열매를 맺으며 주의 길을 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으니 그 대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서 육신의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를 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를 위해 준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생활할 권리도 있고 결혼할 권리도 있으며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생활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생활할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을 위해 사도 바울은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 교회는 오해했습니다. 다른 사역자들은 권리를 주장했지만, 사도 바울은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더 소망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도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며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어려움이 없게 하려고 침묵으로 참으며 장애가 없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교회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만을 소망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사역자가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탐욕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역자는 교회를 돌보며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사역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 손해를 보며 장사하고자 합니까? 세상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며 생활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바보가 되어도, 개고생해도 고린도 교회가 바른 믿음으로 열매를 맺기만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명예를 위한 삶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 절제하며 권리를 양보하며 복음 사역을 위해 일했습니다.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습니까? 차라리 교회로부터 모든 생활비를 받으면 복음을 더 쉽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초대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은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소망하며 일하며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갔습니다. 세상 사람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보화와 같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보화라는 구원을 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의식주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신령한 것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마음이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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