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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3:8-13
강설날짜 2024-03-0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Alxl84HImRc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다.(고전13:8-13)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도 오늘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팡이 교회는 일부 대형 교회처럼 “찬양대”가 없습니다. 그 외 오케스트라와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특송”도 없습니다. 특송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특송은 “특별찬송”의 준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 찬송이 있다는 것은 일반 찬송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찬송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찬송과 특별 찬송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회는 똑같은 사랑을 받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찬송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특별 찬송은 더 귀하게 받으시고 일반 찬송은 더 귀하지 않게 영광 받겠습니까? 참고로 일부 대형 교회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연주를 하며 예배합니다. 예배는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영광을 올려드리는 시간입니다. 일부 연주가들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는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함께 찬송해야 합니다. 다 함께 찬송할 수 있도록 교회는 노력해야 합니다. 일부만 노래하는 것은 좋은 방향이 아닙니다. 일부 성도만 찬송하지 않도록 하려면 악기를 사용하며 연주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할 때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가 중에 칼빈은 악기 사용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쯔빙글리는 악기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왜 종교개혁가들이 이런 생각을 했는지 교회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랑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인해 교회는 값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 중에도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랑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랑을 오해하지 않게 하도록 사랑이라는 단어를 고전13장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많이 사용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고전13장에서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는 사랑장을 은사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은사 중에 최고라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백성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고린도 교회처럼 서로 자신의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하면 분쟁을 넘어 교회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시어 결국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를 넘은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하게 생각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래 참을 수 있으며 시기하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기뻐하며 참을 수 있는 인내와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딜 수 있기 위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8절을 보시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던 예언과 방언 그리고 지식은 폐하여진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랑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영원한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비밀과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언이 나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언만 아니라 지식도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사람은 지식을 좋아합니다. 지식이 있으면 자신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가 있다면 고린도 교회처럼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있는 성도는 고린도 교회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에 온전한 심판이 오면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성도는 극치의 기쁨을 누립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주로 오시면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은사는 불필요하게 됩니다. 교회의 사역을 위해 존재한 것이지만 마지막 때는 불필요합니다. 9절을 보시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온전한 것 같지만, 온전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불완전하게 알고 있지만 마지막 때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불완전했던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날이 언제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때를 향해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구원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오랫동안 했지만, 마지막 때에 주여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은사를 받았고 열심히 사용했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칭찬받는 교회였습니까? 오히려 사도 바울로부터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지팡이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자만하지 말고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것이 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온전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정된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재림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때를 기다리며 오직 교회를 위해 사역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재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은사를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은사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서로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 절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진리를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11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입니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장성한 시절까지 성숙하게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깨닫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계속 그 나이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다 알지 못하면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어린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계속 어린이로 머물러 있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어린아이의 말과 행동 등이 때가 되면 완전히 없어집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장성하면서 더 자세하게 알게 됩니다.

 

개신교 역사에서 어거스틴은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어거스틴이 기록한 “기독교 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말씀 같기도 합니다. 틀린 말씀입니까? 맞는 말씀입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말씀을 통해 성경을 많이 배우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지 않고 말씀만 배우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지 종교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도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지식을 쌓아가는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계시”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11절과 다르게 12절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장차 누구를 만나기 때문입니까?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만날 수 있는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차이가 분명함을 알도록 합니다. 이 세상은 거울로 보는 희미한 세상이지만, 주님의 때는 희미한 것이 사라지고 온전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지만,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지식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쁨이 있습니까?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얼굴을 맞대고 뵐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이룬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아야 했지만, 자신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은사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분쟁이 없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는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 중에 최고는 사랑의 은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알지 못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랑하던 은사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우월성을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은사보다 더 좋아하며 은혜보다 사랑을 좋아했습니다. 13절은 고전13장의 결론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참된 은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마지막 때라도 변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순금과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삼위 하나님을 믿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인해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부활을 믿도록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인해 소망을 품고 있는 교회는 마지막 때가 되면 소망을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극치에 이르는 날에도 교회는 사랑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경시되거나 배제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 교회를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연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도록 합니다. 사랑은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은사와 다른 것으로 마지막 때에도 변하지 않고 영원토록 존재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으로 삼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의 결과요 열매이며 증거입니다.

 

교회는 모든 것을 참아내고 인내하기 위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은사와 다르게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사랑으로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이 있다면 교회는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하나님께 주신 사랑으로 인해 이웃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금은 온전하게 하나님을 청동 거울처럼 사랑하며 볼 수 있지만 주님의 때에는 얼굴을 맞대며 진정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청동 거울처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믿음과 소망으로 사랑을 베풀며 진리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하며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위대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가라지가 아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상업의 도시였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면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는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말과 지식도 뛰어난 도시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부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생에서는 좋을지언정 마지막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여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랑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는 늘 돌이킴이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교회를 살리는 길이며 마지막 때에 주여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다 아시고 구원하십니다. 사랑은 사람을 온전하여지도록 하며 성숙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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