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8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7:-10
강설날짜 2018-03-04

지팡이교회는 지난 주 “베드로를 연단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강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었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룟 유다의 마지막 인생의 의미”을 통해서 주님의 길을 잘 가시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이 가능해진 종교지도자들은 불법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의 죄를 찾고자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심문을 당하면서도 늘 한결같이 진실을 말하였지만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제9계명을 어기면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당신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면서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리면서 그리고 눈을 가리고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예언하라”고 하면서 조롱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심으로 바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모든 기도를 마치신후 가룟 유다와 종교지도자들의 경비대원들이 “칼과 몽치”로 왔을 때 결국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결말을 보고자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였습니다. 왜 통곡을 한 것입니까?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에 대해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병행본문인 눅22:61-62절을 보시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는 말씀이 베드로를 연단하는 과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세 번에 걸쳐서 거짓말을 하는 베드로를 보면 죽일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첫 번째 거짓말을 할 때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되 나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노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거짓말에서는 이번에는 “맹세하여” 부인하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연단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사단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심으로 나그네와 같은 세상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고자 했지만 자신들에게는 사형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힘을 빌리려고 아침이 되자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의 폭동이 아마도 더 무서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불법을 덮고자 하는 극악한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은 저 번 주에 이어서 다시 오늘 본문 1-2절을 보았으면 합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처형을 유월절이 시작하기 전에 마무리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고자 함으로 메시야이신 것을 거부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부귀영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확인해야 했지만 오히려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판결하지만 오히려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의 우리도 어떠합니까? 저도 부끄러운 목회자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베드로와 같이 “심히 통곡”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로마의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서둘러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회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당한일과 빌라도에게 넘겨진 일에 대해서 결국 이 일의 모든 일을 아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배신한 가륫 유다였습니다. 베드로처럼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멀지 아니한 곳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한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는 곳에 있다는 것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배신한 것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추측이지만 나중에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상했던 가륫 유다에 대해서 마태는 3절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예수님을 판 유다가 자신이 스스로 뉘우쳐 그들에서 받은 ‘은 삼십’을 도로 주면서 4a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의 후회의 감정과 핏값을 돌려주려는 시도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유다에 대해서 ‘스스로 뉘우쳐’라고 기록을 함으로 후회와 자책감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 가룟 유다에 대해서 생각하면 마음의 변화를 뜻하는 “회개”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유다가 회개한 것이 아니하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회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헬라어의 단어인 “메타노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넘겨줌으로 당신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해방하여 구출하여 줄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보여주신 것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죄한 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함으로 예수님께서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륫 유다는 예수님이 무죄냐 아니냐가 자신에서는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말을 듣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4b절에서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하면서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유죄냐 무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로마의 힘을 빌리어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다보다 오히려 더 완악하고 강퍅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유다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후 5절을 보시면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유다도 돌이켰으면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돌이킨 후 유다는 더욱 연단되어 사도의 역할을 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자살은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요 유일한 자살 사건이기도 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오직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행1:18-19절에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밭이라는 뜻이라)”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고자 했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때 그가 택한 것은 결국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절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입니까? 베드로처럼 돌이키고 복음의 증인자로 주의 길을 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죽음을 안 종교지도자들은 6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피의 값이기 때문에 성전고에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거래를 했던 그들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유다가 버리고 간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와 같이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묘지를 구입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은 부정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나그네를 위한 묘지를 구입한 것입니다. 특히 유대의 절기인 유월절이면 온누리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고 칭하는 유대인들이 제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 때에 고향으로 왔지만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이 왔다가 사고를 당하여 죽었을 때 매장할 장소가 마땅치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돈으로 부정한 땅을 구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기는 오늘날 어렵지만 최소한 4세기에 비롯된 대부분의 교회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남쪽의 힌놈 골짜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귀한 은혜의 직분을 맡기셨지만 결국 어리석음과 불행의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유다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해답은 “새 하늘과 새 땅”인 본향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난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마태는 8절에서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밭이라 일컫느니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왜 토기장이의 밭이 피밭이 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의 불법을 저지른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행1:19절을 보시면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밭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유다가 피를 흘리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람어인 ‘아겔다마’라는 명칭을 추가함으로 이방인에게도 알림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알린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태는 9절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그런후 10절에서는 난제로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학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씀은 슥11:12-13절을 보시면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9-10절은 예레미야가 한 말씀으로 인용하는 것은 아마도 더 유명한 선지자인 말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받은 은 삼십을 던지고 사라짐으로 대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의의 밭을 구입한 것으로 두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지만 더 유명한 예레미야만 언급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은 유다의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 등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뒤에서 움직인 사단에게 결국 마지막 시대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베드로를 연단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그는 비겁하고 나약하고 겁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히 통곡을 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자신의 죄를 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끝까지 읽어 보시면 갈릴리로 간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반대로 가룟 유다는 어쩌면 베드로보다 더 나은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인간의 윤리적이요 도덕적으로 따지기 위해서 즉 죄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시 은 삼십을 가지고 그들에게 간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가룟 유다가 베드로보다 더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돌이킬 줄 아는 즉 회개하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을 볼 때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지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할 때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알았다면 책임을 지고 피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의미와 공생애에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선지서에서 늘 돌이키라는 의미도 생각하면서 기도함으로 사도의 길을 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즉 나 때문 아닙니까? 저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목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30대 후반에 교회란 무엇인가를 알고 목회의 길을 선택 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와 같이 겁쟁이요 연약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연단을 받고 있으면서도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으니 나를 믿고 용서 받아 영생하라”는 의미를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날에 주님을 믿는 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편의점보다 예배당이 더 많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사람이 많은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을 당할 때 과연 나라면 당장이라도 가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증언하겠습니까? 오히려 거짓 증언자가 넘치지 아니했습니까? 사도로 택함을 받은 자들도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일의 결국을 알고자 했지만 닭 울기 전에 세 번 그것도 맹세하여 저주하면서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자신의 선택을 하기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것을 알고 기도함으로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지막 인생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93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강설하다(2) 전은덕 행3:17-26 2018-07-08 27
92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강설하다(1 전은덕 행3:11-16 2018-07-01 27
91 두 사도가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 무슨 사건이? 전은덕 행3:1-10 2018-06-24 0
90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은덕 행2:42-47 2018-06-17 29
89 베드로의 강설에 의한 사람들의 반응 전은덕 행2:37-42 2018-06-10 38
88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 전은덕 행2:14-36 2018-06-03 27
87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전은덕 행2:5-13 2018-05-20 0
86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살렘에 모여 한 일들 전은덕 행1:12-26 2018-05-13 7
85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전은덕 행1:9-11 2018-05-06 25
84 내(예수님) 증인이 되리라 전은덕 행1:6-8 2018-04-29 40
83 사도행전을(성령행전) 아십니까? 전은덕 행1ㅣ1-5 2018-04-22 37
82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전은덕 마28:11-20 2018-04-15 36
81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전은덕 마28:1-10 2018-04-08 36
80 예수님의 장례식의 문제 전은덕 마27:57-66 2018-04-01 41
79 예수님의 외침,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전은덕 마27:45-56 2018-03-25 8
78 예수님께서 희롱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전은덕 마27:27-44 2018-03-18 19
77 빌라도의 재판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판결 전은덕 마27:11-26 2018-03-11 55
» 가룟 유다의 마지막 인생의 의미 전은덕 마27:-10 2018-03-04 85
75 베드로를 연단하시는 예수님 전은덕 마26:69-27:2 2018-02-25 57
7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전은덕 마26:57-68 2018-02-18 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