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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18-25
강설날짜 2020-11-0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NdDgx0FRfUA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메시야가 성육신으로 오셨다(마1:18-25)

 

한국 교회사에서 과거보다 오늘날 시대는 어떠합니까? 초기 기독교는 열심과 열정 그리고 신앙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열심과 열정 그리고 신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심과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보다 자신을 위한 열심과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위한 신앙보다 기복주의에 물든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삶의 모습을 보면 어떠합니까? 자신이 중심이고 하나님께서는 변방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까? 많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과거보다 강설이 많이 전하여지는 시대에 자신의 머리를 조아리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분들이 많은지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경건한 신앙인의 삶보다 돈의 노예로 생활하는 시대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까? 마음의 평온을 위해 믿는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선택적으로만 믿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은 좋아하는 말씀만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편의적으로 믿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준 분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보잘것없는 우리와 만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님의 무게를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우리와 사귐이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을 가볍게 경배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며 예배합니다. 예배만 그러합니까? 삶에 예배에서도 하나님 없는 삶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 기복주의적인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복주의적인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왜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하는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잘 알 수 있도록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전환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렸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 물들어버린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왕의 족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심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족보에서 왕이 아닌 선지자 두 명을 기록했습니다. 왜 이렇게 변경한 것입니까? 시편 기자이면서 선지자인 아삽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모스의 저자 아모스를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기록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마태는 족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전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한 유대인의 역사는 가장 참혹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신적 수동태를 사용함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출생한 것이 아님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즉 하나님만 아는 방법이었습니다. 마태는 족보에서 낳고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의 출생에서는 낳고라는 단어가 아니라 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시니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메시야가 탄생했음을 알린 것입니다. 오늘은 그것을 자세히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계획이 섭리 가운데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성취되는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메시야의 탄생이 왜 중요한지 기록했습니다. 조상들의 역사 즉 족보를 통해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도록 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를 알도록 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사람의 출생과 같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하나님을 참되게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것을 위해 부모를 소개했습니다. 18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부모가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결혼하기로 정혼 한 사이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혼인한 사이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정혼은 결혼과 같았습니다. 정혼 한 상태에서도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여보, 자기, 아내라는 존칭을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정혼은 대체로 1년 정도였습니다. 정혼 한 상태에서 남자가 사망하면 홀아비로 여자가 사망하면 과부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정혼 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간음죄입니다. 그런데도 마태는 자신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리스도라는 신적 호칭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밝힌 것입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동정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출생으로 오셨다는 것을 세심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기록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관계로 출생한 분이 아니므로 원죄를 가지고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없이 어떻게 잉태할 수 있는가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태는 정확한 사실을 선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태는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성 즉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마1:1절부터 17절까지 족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 만큼 아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같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누가는 눅1:35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5절은 마리아가 어찌 처녀인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에 대한 천사의 답이었습니다. 35절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신분으로 잉태하고 탄생하신 분은(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으로 탄생하셨지만,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섭리라면 미혼 여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입니다. 정혼 한 여인을 통해 출생하도록 하는 것은 심각한 불륜으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을까?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정혼에 관한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혼은 혼인 관계 즉 결혼과 같은 것으로 유대인들은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혼 한 상태에서 자녀가 출생하면 적법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혼에서 출생하면 간음죄이기 때문에 메시야로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사람의 관계를 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법한 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유일한 방식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어떤 종교에서도 있지 아니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탄생하신 메시야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성령으로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큰 염려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정혼 한 요셉은 어떻겠습니까? 대부분 파혼을 하고자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하게 다 지키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잘 알고 최선을 다해 삶을 생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도 약혼을 하기로 한 여인에 대해 파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마리아가 정혼 한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말했는가?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끊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말만 듣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와 반대로 요셉은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한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요셉은 마리아를 지켜 주고자 했습니다. 임신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안다면 마리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당할 고난 등을 막아주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끊는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마5:13절과 마19:3절에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내를 버린다”와 “이혼하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요셉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좋은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잠을 자는 가운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주의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혈통으로부터 메시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에게도 족보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요셉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의 천사로부터 다윗의 자손이라고 들을 때 놀랐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의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한 것인지 직접 명백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즉 성령으로 메시야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천사는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주의 사자 앞에 “보라”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독자 즉 유대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분들과 성경을 읽는 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환기 시키거나 무언가 새롭거나 독특한 내용을 소개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우리말 번역본에 없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이유는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에 대한 것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불결한 임신이 아닌 거룩한 임신을 한 것을 말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20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는 21절에서 성령으로 잉태한 아들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라고 합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아들을 위해 선택하신 것은 예수였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이름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신중하게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로마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것을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주변국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위해 희망적인 이름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원죄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서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구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자기 아들에게 지었지만, 인류를 구원할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원죄가 없는 메시야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영광이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주의 천사로부터 들은 요셉은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21절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근본 목적을 알았을 것을 믿습니다. 원죄의 멍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2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이 말은 주의 천사가 한 말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마태가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에 대한 직접 인용과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성취된 구약의 예언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수 없이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말한 것을 현실화 즉 이루신 것입니다.

 

마태는 사7:14절을 23절에서 인용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을 알기 위해 이사야가 말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가 동정녀로부터 예수님께서 탄생한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 예언은 남왕국 유다마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아하스왕 때에 주어진 것입니다.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함께 유다를 침략하여 남유다가 수풀처럼 흔들리고 요동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만 믿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남유다에게 임마누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완악하고 폐역한 자들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심으로 너희와 함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차 처녀로 아들을 낳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사야가 예언한 것을 기록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는가?입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 등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의미처럼 예수님도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가 한 말을 이해했습니다. 그런 후 요셉이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24절을 보시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스스로 깨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즉각 적으로 일어난 요셉은 주의 사자가 말한 대로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시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동침치 않고 아들을 낳은 요셉은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가 말한 예언대로 임마누엘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동침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 한 배경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사7:14절을 인용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처음에는 마리아를 지켜 주고자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의 사자가 요셉이 잠들었을 때 마리아의 임신은이 성령으로 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은 인간적인 고민이 많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은 비로소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의 이해와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주었습니다. 단지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의 은혜입니다. 마태가 전한 것을 우리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며 삶에서 예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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