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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7:10-15
강설날짜 2019-08-25

베뢰아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했습니까?(행17:10-15)

 

페이스북에 어떤 분이 올린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난 7월 17일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는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제목의 앵커브리핑에서 한국교회 신자들의 무너진 자존심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고(故) 이원영 목사를 소개했습니다. "장로교단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전투기까지 헌납했던 시기,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그는 교회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교단에서 출교 처분까지 받았습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 그 암흑의 시절을 보낸 이후에 여운형 선생은 물론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그를 찾았으나, 그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권력과 금전과의 타협을 마다하고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이원영 목사. 그때의 교회는 신사참배로 무너졌다지만 지금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앵커브리핑을 마칩니다. 한국교회에 순교자 목사로 주기철, 손양원 목사는 유명한데 이원영 목사는 다소 낯선 이름입니다. 이원영 목사가 과연 어떤 분이기에 JTBC 뉴스에서 그를 개신교의 자부심으로 소개하였을까요? 이 목사는 1954년에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고 신사참배 취소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38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도부를 공격하지 않고 분열된 장로교의 화합을 위해 끝까지 힘쓰다 1958년 6월 21일 72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 목사의 자리는 교회입니다.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를 사경회, 성경공부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목사의 정체성입니다. 정치권력의 이권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찬성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정죄와 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입니다."(긴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도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온누리에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된 일꾼이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면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워가는 가운데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지난주 강설은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늘 해오던 방법대로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 즉 강설(설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화와 쇼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사도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해야 하는 복음입니다. 다른 것을 전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참된 복음을 들은 자들은 변화가 생기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서 읍장들에게 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문제보다 오히려 정치적인 문제로 고소한 것입니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역죄입니다. 로마의 속국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을 지지하는 자들과 고소한 자들을 지지하는 자들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바울에 관한 사건은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야손과 형제들은 놓아주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바울 일행을 다시 데살로니가 지역에 들어오지 아니하도록 하겠다는 것을 약속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석금을 받고 풀어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역에 복음이 들어갔고, 다른 지역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므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에서 나온 바울 일행은 베뢰아에 도착한 것입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80km 지점,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헸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늘 해오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누가는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메시지를 자세하게 기록을 했지만, 여기서는 무슨 강설(설교, 강론)을 했는가는 없습니다. 아마도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데살로니가 사람과 베뢰아 사람에 대한 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11절을 보시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질서를 존중하고 일을 한꺼번에 혈기로 하듯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과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또한 베뢰아 사람은 예의도 바르고 질서를 잘 지키며 생각하는 것도 바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것에 대해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수용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성경을 통해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종교적인 감정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좋은 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터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땅으로 삼십배, 육십배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초창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경회(부흥회는 올바른 말이 아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베뢰아 사람처럼 사모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퇴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흥회라고 하면서 강사를 소개하고 그분에 대한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니 그렇게 알아 들읍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흥 강사는 말씀을 잘 전하는 말씀 봉사자(목사)보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 돈을 많이 내도록 하는 자들을 이용함으로 오히려 교회가 쇠퇴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부흥회가 잘 될 수 있도록 아멘을 선동함으로 성경은 과연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마음으로 감동되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아멘하면 복 받는다는 소리에 무조건 아멘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부흥회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경회라는 말처럼(워키백과)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의 특별 집회이다. 주로 한국교회에서 사경회(査經會)의 목적은 성경을 집중적으로 강의함으로써 신앙을 강화하고 삶을 변화시키는데 강조를 하는 것이다. 부흥회는 말씀의 증거나 체험적 증거나 은사적 사역을 강조하지만, 사경회는 이런 면들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성경 말씀 중심의 집회가 중심이 된다. 사경회 운동은 초기 한국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를 생각하면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아멘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오해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참되게 알 때 아멘해야 합니다. 아멘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참고로 “부흥회는 주로 감정의 흥분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감정의 흥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한국 교회에 부흥운동은 그 출발과 동기 자체가 순수한 의도적인 복음전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회불안, 위기의식과 같은 외적 충격과 현실 부정을 달래는 카타르시스적 신앙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 특징은 성경진리와 신학적 이론에 입각한 복음이해와 해석을 결여하고 있는 반면에 감정과 심령의 흥분이란 흔히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 참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가 많다.”)

 

베뢰아 사람은 참으로 신사적이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인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12절을 보시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누가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만 아니라 이방인 즉 귀부인과 남자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에는 첫 시작을 ‘그 중에’로 되어있지만, 원어를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알려주는 것이 있습니다. 베뢰아인들의 개방적인 태도와 행동의 결과 말씀을 사모함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군분투를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복음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를 당해도 주님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1:8절에서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소문’으로 온 누리에 퍼짐으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고난 중에 오히려 교회는 든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뢰아에서 복음이 퍼지고 성장한다는 소리를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신들의 지역에서 교회를 공격하던 자들이 이제는 베뢰아에도 온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바울 일행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소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에 대한 적대감은 베뢰아에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베뢰아에서의 선교 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왔던 것입니다. 이럴 시간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상고해야 합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킨 것과 같이했으나 별다른 결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베뢰아인들은 신사적이어서 소동에 혼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공격하면 교회가 흔들리는 것은 성경을 잘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베뢰아인처럼 지팡이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성경을 펴서 말씀을 끄집어내서 논리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믿음의 선배님들은 말씀 봉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를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었던 베뢰아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요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서 좋은 결과를 맺은 바울은 이제 아덴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실라와 디모데를 두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하여 베뢰아 안에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나면서도 그들의 성장을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남아서 잠시 동안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후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에서 바울과 다시 만납니다. 15절을 보시면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은 마게도냐의 대부분을 여행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 장소를 택해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덴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전한 메시지로 인하여 박해를 받은 바울과 일행은 부득불 그 지역을 떠나 베뢰아에로 떠났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곧바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사적이어서 바울 일행은 성공적인 전도 활동을 한 결과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베뢰아는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한 도시로서,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베뢰아에서 전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화려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당하였지만,기대치 않았던 지역인 베뢰아에서는 놀라운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 누가는 그들의 독특성을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즉 성경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사모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모합니까? 복음을 거부하면 지금 당장은 좋을 수도 있지만,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를 보면 이상하게 전하는 자들에게 속아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을 쫓아 따라가는 현상을 보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성경을 잘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성경 안에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참된 가르침은 성령께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성경을 상고하여 믿는 신앙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전해 주는 말씀만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 한다면 어려움이 닥치거나 다른 가르침을 듣게 될 때 넘어가기 쉽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복음을 편견 없이 듣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여 확인하는 자들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확인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했습니까?”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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