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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22-04-0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T-CcTXrCNU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문

 

오늘은 제3문으로 “당신은 어떻게 죄와 비참함을 압니까?”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겠습니까? 자연입니까? 우주입니까? 사람으로부터입니까? 아니면 과학으로부터입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이것들로 죄의 비참함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문의 고백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비참함을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참함을 알 때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비참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인 시편 22편 1-2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여 울부짖음을 시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죄의 비참함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울부짖는 탄식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탄식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고 하며 기도해도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해도 나를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죄을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시편 기자는 6절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벌레에 비유합니다. 죄를 알게 되면 이처럼 자신을 벌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벌레에 비유하며 절망감을 잘 표현했습니다. 비참함의 상태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벌레에 비유하며 “내 하나님이여”라고 하며 “내 신음 소리”를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야로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지적해 주면 죄의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야 죄의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죄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죄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친구로부터 과학으로부터 자연 만물 등을 통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 인해 사람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죄의 저주에 있는 우리를 당신님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며 탄식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여기서 곤고함이란 비참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사람은 죄와 죄책감 그리고 비참함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갈망하며 영광의 삶을 생활하고자 기도합니다.

 

천지창조 후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생활하도록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순종의 법칙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눔의 실과만 먹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기에 사람은 순종하면 됩니다.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유롭게 풍성한 열매를 원하는 만큼 먹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사람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생활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의 비참함을 알고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이 은혜에 늘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하나님과 교제를 거부했습니다. 교제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므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야 하나님의 이름을 찾습니다. 선지자들이 외쳐도 듣지 아니했지만, 포로가 되어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비참한 현실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비참함을 당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스라엘 땅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시편 22편의 다윗의 시처럼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죄와 다른 죄를 지으며 죄를 인식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원죄로 인해 비참해진 결과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많은 재물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온전한 마음과 양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심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을 알도록 하심으로 인애하신 구세주를 찾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나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 하나님께 구하며 희망을 찾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다는 것을 아는 힘입니다. 이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비롯된 은혜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당연히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며 비정상적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떠나 있다는 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심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시며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의 비참함을 알게 되므로 구원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질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입니다. 율법이 있으니 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 믿음의 선배님들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마22장 37절과 40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려 준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쉽게 요약하여 주신 것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전체의 강령이며 요약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알 때 자신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인애하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로 인해 성도는 예수님을 믿으며 의지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한결같이 말씀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잘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의 죄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위로 일어난 사건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죄도 죄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도 마음의 죄도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과 법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또한 원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거울로 사용하셔서 우리의 죄를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지은 죄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거울로 보듯이 하여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온몸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율법이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요구를 “하지 말라”와 “하라”로만 중요시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613개의 항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하라”는 248개이며 “하지 말라”는 365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하시며 당신님에게 와서 배우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무지는 무섭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무거운 짐을 무겁게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의 심정을 알도록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사랑도 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다 지키어도 사랑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른다면 구원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면서 생활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율법의 요구는 결국, 사랑을 알도록 합니다. 율법은 죄의 비참함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으로 초대합니다. 율법은 죄의 비참함을 알도록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을 읽을 때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죄로 타락한 자들은 죄가 없다고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며 욕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도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게다가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랑으로 우리는 죄의 비참함을 알게 되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이루고자 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하지 못할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믿기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배하는 삶을 생활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을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만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을 강설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도록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마음과 뜻과 행실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으로부터 성도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서로를 하나가 되도록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있기에 열매 맺는 삶으로 예배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어겼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요구하십니다. 지킬 수 있도록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형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율법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의 비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나의 유일한 소망은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의를 입고 힘 있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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