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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1:1-6
강설날짜 2021-12-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3yz7qgwUfZg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질문(마11:1-6)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1517년 10월 31일 무엇을 하였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꼭 알아야 합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은 잘 알아도 10월 31일에 일어난 교회개혁은 잘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10월 31일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었습니다.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교회를 쇄신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불교를 개혁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를 다시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믿음의 선배님들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외친 구호는 오늘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주의 길을 잘 가고 있느냐? 우리가 외친 구호대로 너희들은 늘 교회개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구호라 믿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치기 위해 그는 라틴어로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의 반박문을 붙이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독일 사람들은 모국어를 말로는 하여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10% 정도였습니다. 문맹률이 90%였습니다. 오늘날보다 더 심각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당은 성화와 조각 등을 이용해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톨릭은 가장 타락한 교회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문맹률이 낮은 사람을 위해 독일어로 반박문을 걸어도 쉽지 않은데 어떤 언어를 사용해 걸었습니까? 모국어가 아닌 라틴어였습니다. 라틴어는 이탈리아반도의 중부에 있는 고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서 생활하던 라티움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 로마가 많은 지역을 지배하면서 라틴어가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글로 표현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교육이 약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통해 당신님의 교회를 회복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신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쇄술이 발달했을 때 루터를 통해 문맹률이 낮더라도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셨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독일 지역만 아니라 유럽 지역에 교회개혁이 무엇인가를 전해졌습니다. 문맹률이 낮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가 더 타락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개혁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종교개혁의 유산을 남기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본분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그런 교회가 그립지 않도록 거룩한 공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를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교회가 이 땅에서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 위해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통해 말씀으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후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공회와 임금들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애처로운데 가족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열두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인 우리는 지상명령을 감당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영적 추수꾼으로 세상에 화평을 전하는 성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주님을 시인하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비굴해지기도 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목숨을 위해 비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새로운 전환점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사역을 마무리하는 것이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10장에 대한 제자들의 전도사역이 끝난 것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막6:30)과 누가복음(눅9:10)에서는 제자들이 여려 동네에서 사역하고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이 더 중요했기에 생략한 것 같습니다. 마태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누구신가를 알려야 하기에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하여튼 제자들은 “여러 동네”에서 즉 갈릴리의 동네에서 사역하였습니다. 제자들만 사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갈릴리 주변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2절에서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라고 기록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던 이유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취하여 결혼한 것에 대하여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어떠한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까? 3절을 보시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마도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이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복을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을 가져올 장차 오실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고 있는지를 염려하여 제자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제자들에게서 듣고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이 맞는가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시대는 저물고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질문을 했는가는 난해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면서 사람은 강한 것 같아도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제자에게서 들어야 했기에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생각했던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며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하며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등등의 사역을 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감옥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들어보면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 질문은 단순하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수동적 입장에서 막연히 기다리는 뜻이 아니라 절실한 기대를 하며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의 의미로 질문한 것입니다. 메시야를 기대하며 갈망하는 세례 요한의 마음이 녹아 있는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을 그대로 요한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8장과 9장에서 하셨던 당신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하여 주시면 좋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질문에 대한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심사숙고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질문하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이미 내가 한 사역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러니 “듣고 보는 것”을 자세히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지금까지 사역해 온 것이 무엇인가를 세례 요한이 참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당신님이 사역해 온 것에 대한 참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듣고 보는 것”만 이야기하시지 않고 5절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여 주셨습니다. 다섯 가지는 구약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이루셨으며 이제는 당신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날이 도래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 말씀을 전해 들은 후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이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본 사람 중에 영광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듣고 보는 것”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신 후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는 않는다고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을 꾸짖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메시야가 오셨으면 지금 당장 심판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야가 아니기에 백성들과 충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역은 말씀의 가르침과 치유였습니다. 치유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것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시므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님을 통해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복된 교회입니다. 복된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이 계시로 믿습니다. 그럴 때 이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셔서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자들에게 새로운 복음은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단절된 자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원하는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강설을 듣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이해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는 허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성경을 읽은 저자가 있었습니다. 그 저자의 영화는 “쿼바디스”입니다. 아주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였습니다. 쿼바디스는 역사소설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정했지만, 성경을 읽고 대작을 만들었던 작가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교회로 전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세상의 삶을 좋아하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보다 세상에 보물을 쌓아두고자 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말씀만 믿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추어졌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르게 믿을 수 있도록 성경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이 온전하게 다 기록되지 않았을 때 세례 요한도 메시야에 대한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하였습니다. 오히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숨기운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것만 아니라 거룩한 공교회를 위해 사귐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질문”이라는 강설을 통해 예수님이 정체성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생각하던 의문으로 인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질문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며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인 것을 넘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통해 실족게 되는 일이 없게 하려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실족게 되지 않도록 성경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듣고 보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사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함으로 실족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세례 요한처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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