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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엡1:3-6
강설날짜 2022-03-13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엡1:3-6)

 

해마다 이때면 저는 사순절에 관한 이야기합니다. 올해는 조용하게 지나가고 싶었지만, 어느 예배당을 지나칠 때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순절에 대한 현수막이었습니다. 그중에 성금요일 기도회라는 문구가 저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중에 사순절도 폐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른 개혁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사순절은 없었습니다. 사순절은 미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는 그럴 듯 하지만, 성경의 말씀에 없다면 지키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사순절을 하는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아픔을 생각하고 동참한다는 의미로 행사를 만들어냅니다. 새벽 기도회 때 각 부서가 돌며 찬양을 하기도 합니다. 헌금하도록 함으로 복 받으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사순절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성경에 있는 것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사순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http://m.kmib.co.kr/view.asp?arcid=0924066805) 링크를 연결하시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은 “사순절 재의 수요일과 반짝이는 십자가”입니다. 미국의 앵커가 이마에 검은 십자가를 그린채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위대한 신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렇게 이마에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절기가 주일이나 월요일을 기점으로 시작되지만, 사순절은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날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뉘우치고,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와 금식, 참회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들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더 화려한 방법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마에 반짝이는 십자가”를 긋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PCUSA에 속한 일부 교회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모방하면 안 됩니다. 에드먼즈 알렌(Edmonds-Allen) 대표는 "이마에 반짝이는 십자가를 긋는 것은 성 소수자 기독인 혹은 그들을 지지하는 기독인들이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알리는 행위"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으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홈페이지 또는 주보에 교회를 소개합니다.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를 따른다는 문구를 넣기도 합니다. 좋은 글을 사용하지만, 일부 교회는 문구와 전혀 다른 곁길을 갑니다. 이런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정작 마음은 세상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업처럼 성공할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사가 더 중요합니다. 기업이 광고하며 상품을 팔듯이 교회도 기업처럼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정착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성도는 성경 말씀을 사모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에서 멀어질 때 타락합니다. 오늘날 시대를 생각하면 다시 중세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순절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4:10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참된 신자입니까? 참된 성도입니까? 참된 교회입니까? 깊이 고민해 보십시오.

 

지난주 지팡이교회는 “에베소서를 알자”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후 3차 전도 여행 때 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쇠사슬에 매여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정신적인 지주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를 위해 사랑과 위로를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보편교회를 위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하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신실하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구별된 사람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이니 신실한 자로서 믿음을 지키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성도는 은혜와 평강의 복을 누리는 신실한 자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시작이며 평강은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때문에 우리는 새사람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에베소서를 바르게 알기를 소망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정수라고 하기도 하고 최고봉이며 바울 서신중에 가장 숭엄하고 엄위롭게 표현한 책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알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후 3절을 보시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찬송한다고 합니다. 왜 찬송을 해야 합니까?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찬송해야 합니다. 사람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을 알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은 사람과 창조주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신실한 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기 때문에 찬송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찬양할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성도는 복을 누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새로운 백성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은혜와 평강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예배 시간만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신앙고백 하며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가 돼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림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하늘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5:8절 말씀으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이 말씀 중에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세상의 복 즉 잘 먹고 잘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육신과 관련된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찬송가를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이 찬송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타락한 사람은 세상의 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빌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주 안에 있는 것이 복이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는 백성이기에 찬송하며 기뻐하라입니다.

 

신령한 복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 사람도 주님 안에서 구원받을 때 신령한 복 즉 하늘에 속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직자가 중보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오직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성도는 신비적 연합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며 맛보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불행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그리고 대선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다는 신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행입니다.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도를 선택한 목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6절을 보시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먼저 4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성도에게 복을 전해 주신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선택입니다. 죄로 인해 비참해진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성도를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구원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딤후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람이 한 행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세상 사람보다 내가 더 의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택의 대상을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신비로운 연합으로 주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가 선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분명하게 마1:21절에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구원함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선택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의 공적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인해 창세 전에 성도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은 이것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에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해야 합니다. 온전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몸과 영혼이 부활한 후에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마치 안개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지만 몸과 영혼의 부활을 하면 안개가 사라짐으로 환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죽음의 자리에서 종말의 삶을 생활했습니다. 비록 로마 감옥에 쇠사슬에 매인 모습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복음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지키어 주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를 사랑하시며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런 성도가 신실한 교회이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5절을 보시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뜻대로 우리를 예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4절에서는 선택이라고 하시고, 5절에서는 예정이라 하시는데 그것이 그것 아닙니까?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한 방법이나 수단을 강조한 용어입니다. 예정은 “미리 예정하여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 사용된 용어입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한 것이고, 선택은 그 계획을 실행시키는 방법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로 삼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로마법에서 양자가 된다는 의미는 과거의 모든 빚을 탕감받고 새 가족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된 자는 아버지로부터 재산도 상속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아들들이라고 사용하여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해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그러면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삶을 생활하는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이며 진노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는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삼위 하나님께 찬송할 때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신분과 지위와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며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를 순결한 신부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을 멈추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심으로 우리를 통해 찬양받으시기 위한 구원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에 관한 것을 알고 싶으면 홈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고전10:31절에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삶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생활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양자 됨을 받은 자녀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으며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1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영광스러운 은혜와 평강으로 오직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삶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롬12:1-2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43: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삶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강림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구속 성취를 위한 영광을 위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소원과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며 찬양하는 살을 생활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신실한 성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늘 우리는 회개하는 성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추신 비밀을 억지로 들추고 닫으신 것을 억지로 여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경에 가르쳐주신 만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억지로 풀다 보면 곁길로 갈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성경의 말씀대로 따라가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구원의 감격을 알도록 하십니다. 구원의 감격은 하나님의 사랑의 의가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으로 인해 구원의 감격을 알고 있는 성도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유일한 기초는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며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대로 선택의 복을 누리는 우리에게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바른 정체성으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삶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비참한 세상이라도 성도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이미 받은 존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은혜의 영광을 찬송”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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